'비명횡사'한 재벌가 비운의 황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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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건용 기자 2005-07-11

지난 6월16일, 신준호 롯데햄우유 부회장의 장남인 신동학(37)의 죽음을 계기로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한 재벌가의 황태자들이 또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해외도피에서 돌아온 김우중 전 대우그룹을 비롯, LG·현대가문의 재벌 2세들이 그들이다. 실제 이들 재벌가에는 비운의 주인공들이 존재하고 있다. 물론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한 경우도 있지만 비명횡사한 케이스도 많다. 이들이 살아 있다면 국내 최고 기업의 황태자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겠지만 지금 그들은 서서히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지난 6월16일, 오전 태국에서 한 비보가 날아들었다. 신준호 롯데햄우유 부회장의 장남인 신동학의 죽음이 그것이다. 태국 주재 한국대사관 등에 따르면 신동학은 16일 오전 11시(현지시간) 태국 방콕공항 인근 한 서비스아파트(한국의 콘도와 유사) 6층에서 추락, 사망했다.

신동학은 이에 앞서 지난 2일 후배(남)와 함께 태국으로 입국했다. 18일에는 사업차 필리핀으로 출국할 예정이었지만 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경찰은 실족사로 사건을 처리했다. 유족들이 신동학의 죽음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신동학의 시신은 현지에서 화장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롯데가의 소문난 악동’
 
고 신동학은 신준호 회장의 장남이다. 신준호 회장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넷째 남동생이기도 하다. 한순용 전 한 대산업 회장의 딸 한일랑 여사와 결혼한 신 부회장에게는 2남1녀의 자녀가 있다. 동학·동식·경아가 그들이다.

이중 장남 동학은 ‘롯데가의 악동’으로 소문난 인물이다. 계속 이어진 사고로 철창신세까지 진 전력이 있어서다. 지난 1994년 ‘프라이드 사건의 폭력’을 시작으로, 2년 뒤인 1996년엔 동거녀와 함께 대마초와 코카인을 흡입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때문에 재계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사건에 공식적인 직함을 얻지 못했던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신준호 가문의 아픈 상처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가문과 구본무 LG그룹 회장 가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가문의 아들 모두 사고사를 당했기 때문이다.

김우중 회장의 아픔은 장남 선재를 잃은 데 있다. 고 김선재는 미국 보스턴대학 유학 시절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했다. 지난 1990년 11월21일, 당시 김선재의 나이 23살 때의 일이다.

당시 김선재는 밤늦은 시각 동생 김선엽과 함께 운전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때 중앙선을 넘어 달려오던 화물차를 피하기 위해 핸들을 꺾다 차가 굴렀다는 게 그동안 대우그룹 관계자들의 설명.

그러나 같은 시기 보스턴대학에 유학 중이었던 한국인 유학생들은 김선재의 자동차가 보스턴대학 앞을 흐르는 찰스강으로 빠진 사고를 당했던 것으로 전한다. 그는 1989년 2월,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해 9월부터 미 MIT대학에서 산업공학 석사과정 중에 있었다.

이 사고로 김우중 전 회장 일가는 한동안 깊은 슬픔에 빠져야 했다. 어머니 정희자 여사는 선재미술관을 설립, 비명횡사한 장남의 영혼을 위로하고 있다. 특히 대우그룹이 공중분해된 이후에도 김선재는 다시 한 번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김 회장의 안산별장에 안장되어 있는 김선재 묘 때문이었다.

김 회장은 김선재의 유골이 안치돼 있는 안산별장을 2000년까지 매각하지 못하고 유난히 강한 집착을 보였다. 그러나 모 언론에 의해 감추어진 부동산으로 보도되면서 현재 김선재의 유해는 안산별장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못다 핀 꽃’ 눈물짓는 구본무 회장
 
구본무 LG그룹의 아픔은 더 하다. 20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비명횡사한 외아들인 구원모 때문이다. 구 회장 일가는 단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급사함으로써 그 슬픔은 한층 더할 수밖에 없었다. 외아들 사망 이후 다시 아들을 얻기 위한 구 회장 부부의 노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고 구원모는 어린 시절 LG그룹의 확실한 황태자였지만 지금은 구 회장 일가에게 커다란 상처로 남아 있는 외아들이다. 지난 1990년대 중반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정확한 사인에 대해선 아직까지도 LG그룹 관계자들이 철저하게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 다만 급사라는 것만 확인됐을 뿐이다.

구원모가 현재 생존해 있다면 이재용 삼성그룹 이재용 상무나 정의선 기아차 사장 등과 같이 한창 경영수업을 받으며 재계의 주목을 받고 있겠지만 지금 그는 한 줌의 재로 변해 구 회장 일가의 가슴에 커다란 못으로 남아 있다.

종교를 갖고 있지 않았던 구 회장이 독실한 불교신자로 알려진 부인 김영식 여사를 따라 한동안 서울 삼청동 칠보사를 유난히 찾았던 것은 순전히 아들 구원모에 의해서다. 아들의 위패가 안치돼 있던 칠보사를 찾아 구 회장은 슬픈 마음을 달래곤 했던 것.

현재 칠보사에는 구 회장 부부와 장녀 연경 이름으로 원모의 영혼을 위로하는 거대한 석등이 대웅전 앞에 설치돼 있다. 이처럼 불의에 아들을 잃은 구 회장은 LG그룹 후계를 고민하다 50대에 다시 출산을 감행, 지난 1996년 막내 딸 연수를 얻었다. 황태자 잉태에 실패한 것이다.

당시 구 회장의 김영식 여사는 중국 등지를 돌아다니며 용하다는 명의의 진료를 받아 아들 낳기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결국 구 회장은 지난해 말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아들 구광모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비명횡사·자살 많은 현대가
 
한국경제 발전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왕회장) 일가의 파란만장한 가족사도 빼놓을 수 없다. 재계 일각에선 현대 정씨 일가의 잇따른 ‘비운’과 경영난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는 말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들릴 정도다.

지난 1938년 경일상회라는 쌀가게로 출발, 국내 최대 대기업 집단인 현대그룹을 창업하는 신화를 만들었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6명의 형제와 슬하에 8남1녀의 자녀, 30명에 달하는 손자손녀를 둔 다복한 대가족의 가장이기도 했지만 형제와 자식들을 먼저 앞세운 불운을 맞았다.

정 창업주의 아들 가운데 사고로 숨지거나 자살한 사람은 4명에 이른다. 여기에다 동생까지 32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또 첫째 며느리 역시 지병으로 세상을 등졌다. 정 창업주는 이들 중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을 제외한 4명을 2001년 3월 타계하기 이전에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정주영 패밀리’의 불운은 지난 1962년 4월14일 정 창업주의 다섯째 동생인 고 정신영의 교통사고로부터 시작됐다. 정신영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던 중, 독일 함부르크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장 폐색증으로 타계했다.

정 창업주는 7형제 중 기자를 하던 정신영을 특히 자랑스럽게 생각해 아꼈다. 그를 정치에 입문시키길 희망할 정도로 애정을 쏟았다. 이 같은 애정은 정신영을 기리기 위해 ‘신영언론재단’을 설립한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실제 측근들은 정 명예회장이 유능하고 성실한 동생 정신영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는데 함부르크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그를 갑자기 잃자 큰 충격을 받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정신영의 사고사는 현대가문에 찾아온 첫 불운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1982년 4월24일 당시 인천제철 사장으로 근무하던 장남 정몽필이 교통사고로 사망, 향후 이어질 현대 패밀리들의 악운을 현실화했다.

새벽 울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중 경부고속도로상에서 정몽필이 타고 있던 승용차가 트레일러 차를 들이받은 것. 이로 인해 그는 그 자리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이때 정씨 일가는 비통의 질곡 속에 빠졌고 정 창업주는 창업 동지 역할을 했던 장남의 죽음에 대해 무척 애통해했다.

슬픔이 잊혀질 만했던 지난 1990년 4월 현대가문에는 또 하나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정 창업주의 4남 정몽우가 자살한 것이다. 당시 현대알미늄 회장으로 재직했던 그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으며 서울 강남 역삼동 모 호텔에서 음독 자살했다.

하지만 비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난 2003년 7월, 정 창업주의 5남인 전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이 현대그룹 사옥에서 투신 자살했기 때문이다. 정 창업주의 뒤를 이어 대북 사업 바통을 이어받았던 그의 자살은 세간에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비운의 삼성황태자 고 이창희
 
국내 그룹 순위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삼성가문 역시 비운의 황태자가 존재하고 있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차남인 이창희(당시 새한미디어 회장)는 지난 1991년 7월20일 58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사인은 혈액암(백혈병). 이창희는 같은 해 3월 혈액암 판정을 받고 4개월 간 미국 볼티모어시 존스홉킨스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으나 병세가 악화되면서 세상을 떠났다.

이창희 역시 ‘비운의 황태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한때 삼성그룹의 황태자로 부각되기도 했고, 사카린 밀수로 큰 파문을 일으킨 한비사건에 휘말려 옥고를 치렀다. 또 부친인 이 창업주의 눈에서 벗어나 삼성에서 축출되기도 했다.

미국 유학 후 귀국, 당시 국내에서는 생소했던 오디오 및 비디오테이프 사업에 뛰어들어 10여 년 만에 재계를 놀라게 할 정도로 급성장하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던 이창희. 이에 따라 10여 년 동안 절연상태에 있었던 이 창업주도 노여움을 풀어 1987년 운명하기 전 부친으로부터 사면복권을 받았다.

그러나 1988년 3월, 뜻하지 않은 화재로 충주공장이 한순간에 한 줌의 재로 사라지는 참담한 경험을 맛봤다. 이창희는 부친의 타계와 충주공장 전소에 의한 충격으로 지병이 악화되기 시작, 투병생활을 해오다 끝내 운명했다.

그런가 하면 SK가문에선 고 최윤원 SK캐미칼 회장이 비운의 황태자로 꼽힌다. SK그룹의 창업자이자 고 최종현 창업주의 맏형인 고 최종건 회장의 장남인 최윤원은 지난 2000년 8월31일, 미국 시애틀병원에서 지병으로 인해 5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기업인으로서는 한창 일할 나이에 운명을 달리한 것. 최윤원은 1999년부터 지병으로 미국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그는 재벌 2세임에도 불구하고 경영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SK의 전문경영인 체제 정착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실제 최윤원은 경영권에 욕심을 내지 않고 1998년 8월, 작은아버지인 최종현 회장이 작고했을 때 10년 터울의 사촌동생인 최태원·SK 회장에게 경영권을 몰아주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최윤원은 무엇보다 고 최종현 회장 작고 이후 두 집안 형제들을 우애와 화목으로 이끌어 왔다. 최종현 회장 사후 2세들간에 경영권 다툼이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 최종현 회장의 작고 직후 SK케미칼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부사장까지 역임했던 최윤원은 “나는 경영에 자질이 없다”며 전문경영인을 영입한 뒤 경영에는 간여하지 않았다. 재벌  2세였지만 기업경영보다는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고 스포츠와 각종 대외활동을 좋아했던 호방한 성격의 사람이었다는 게 지인들의 전언이다.

기사입력 : 2005-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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